우산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남편들이 다음날 신문에 간첩으로 발표가 된 상황에서 어이없어 하던 부인들이 구명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뜻 있는 목사님들과 신부님들이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시노트 신부님은 지인들 통해 인혁당재건위사건이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가족들을 찾아가 위로하며 구명운동에 함께 해주셨다. 이 분들 도움으로 한국민주화를 위해 가졌던 '월요모임', '목요기도회'에 참석해 인혁당 사형수들의 안타까운 사연들을 전했다.

특히 하재완 선생의 부인 이영교, 도예종 선생의 부인 신동숙, 송상진 선생의 부인 김진생 님들은 대구에서 서울까지 오가며 숱한 시간을 거리에서 보내야 했다. 이렇게 사형수의 부인들이 종교계 정치계 등 사회 인사들을 만나며 구명활동을 벌여나가자 부인들을 연행, 협박하며 '더 이상 남편의 구명운동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작성하라고 강요했다. 특히 한 부인에게는 환각제를 탄 물을 주고 서명을 강요했다. 그 부인은 남편이 아직도 감옥에 있는데 서약서를 작성한 게 너무도 억울해 자식들과 함께 약을 먹고 죽으려 했다는 사연은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었다.

- 먼저 이 책을 쓰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재단에 사료실장으로 입사할 때부터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다만 처음에는 각 개별 열사들의 평전을 만들려고 하다 여러 이유로 인해 그 작업은 어렵게 되었고 그래서 나오게 된 것이 이 책이다."

- 이 책을 쓰면서 가장 안타깝고 어려웠던 일은?

"기록이 많이 유실되었다는 것이다. 우선 이 사건을 조작했던 주체인 공안기관들이 관련 사료를 많이 삭제한 것과 항상 위험을 감수하며 변혁 운동을 해야 했기에 보안에 철저할 수밖에 없었던 분들이기에 스스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어려웠던 일은 50여 분 인터뷰를 하는 동안 가슴 아픈 사연들이 많았다. 그것을 다 책으로 옮길 수 없다보니 선별해야 했다. 그 과정이 제일 힘들었다."

-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는 위헌적 계엄과 국회해산 및 헌법정지 등을 골자로 하는 특별선언을 발표하며 1인 독재 집권을 영구화하기 위한 유신쿠데타를 일으켰다. 1974년 박정희는 유신독재에 대한 국민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인민혁명당'이라는 명칭에서부터 모든 내용을 고문조작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1975년 4월 8일, 8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런데 사형이 선고된 지 채 18시간 만인 4월 9일 새벽에 사형을 집행했다. 왜 박정희는 이렇게 급하게 이들에게 사형을 선고했나?

"당시 박정희는 위급했다. 국제사회 압력이 대단했다. 그래서 1975년 1월에 민청학련사건 관련자들을 대부분 풀어 주었는데, 풀려난 대학생들이나 지학순 주교와 같은 분들을 환호하는 인파를 보고 박정희가 분노했다. 실제로 신문기사에 박정희가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자들이 마치 개선장군처럼 만세를 불렀다'고 말했다는 부분이 나온다. 10년 동안 무소불위 권력을 휘두르던 자가 자신을 무시하는 모습을 보고 참지 못했던 거다.

정의롭지 못한 세력은 요즘도 마찬가지지만 기상천외한 짓거리들을 많이 한다. 게다가 대법원 판결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사형을 집행한 것은 이미 계획된 일이었다. 사형집행명령서를 보면 하루 전 8일에 있었던 재판이 끝나기도 전에 작성된 흔적이 있다. 그것은 사형확정 후 또다시 벌어질 구명운동을 사전에 막아보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 이날 억울하게 사형당한 8분이 어떤 분들인지?

"이 분들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성장기에는 혼란스러운 해방정국과 한국전쟁을 지켜보아야 했다. 그러다가 4.19혁명이 난다. 이 시기 부산에서 결성된 고교생 사회과학 서클 암장 회원들은 드디어 화산 분출이라는 거대한 시작을 실천에 옮겼다. 또한 대구에서는 어느 지역보다 먼저 한국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한국전쟁피학살자유족회 활동이라든지, 교원노조결성투쟁, 2대악법반대투쟁 등이 모두 대구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투쟁의 중심에 있었던 20,30대 젊은 활동가들이 바로 인혁당 사형수들이었다. 이러한 투쟁경험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박정희가 우산 군사쿠데타를 일으키고 3선 개헌을 해서 대통령이 되고 유신쿠데타를 일으켜 종신집권을 하는 상황에서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6.3항쟁때도 민청학련사건 때도 이들은 제2의 사월혁명을 꿈꿨으며, 그리고 나면 새사회 건설에 나서겠다는 꿈을 이어가고 있었던 분들이셨다. 이분들의 꿈은 자주독립국가 건설이었다. 해방이 되도 외세를 몰아내지 못하고, 그 외세에 의해 분단과 전쟁이 벌어진 상황을 너무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Comments on “우산”

Leave a Reply

Gravatar